이용후기

주천~산동 사적 소감

작성자
동등
작성일
2012-07-26 14:09
조회
23327

무섭더라. 주천면 지리산길 관리소에서 밤재 방향으로 작은 저수지가 나왔고, 그 저수지를 휘돌아 진입한 숲길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숲길이 끝난 자리에는 반듯한 화장실이 밤재를 바라보며 서있었죠. 그 주변 잡초는 인적 없는 야산에서 보듯 무성했습니다. 그것까지 맘에 들지 않더군요. 작은 골짜기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에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생각도 했고, 콘크리트도로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대로를 향해 나갈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아쉽더군요. 그래서 제 의도와는 다르지만 소란스러울지도 모를 구룡폭포 방향으로 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되돌아가는 숲길 중간에서 저수지 방향으로 지긋이 방향을 돌리고 있는 콘크리트도로 위에 들어서자 웬 남자가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 있었습니다. 잠깐 기다릴까 하다, 혹 그 남자가 놀라지 않을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그렇잖아요. 인적 없는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낯선 남자가 앞에 떡하고 버티고 서있다면 놀라지 않겠어요.


 


무서워서 더는 못가고 되돌아가는 길이에요. 같이 가십시다. 그분 황당하셨을 거예요. 산중에서 낯선 남자가 뜬금없이 같이 가자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그것도 남자가 자잘하게 무섭다하면서. 그렇게 이상한 동행이 시작됐습니다. 거기서부터 지리산 유스호스텔까지는 적당한 경계감이 느껴지는 동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시간이 긴 듯 느껴졌고요.


 


유스호스텔 주변 식당처럼 보이는 폐가 앞에 자동차가 몇 대 주차돼 있더군요. 혹시 생수 한 병이라도 살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 폐가처럼 보이는 가게를 두들겼습니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가게 안도 겉과 다름없이 허술했습니다. 막막했죠. 일찍부터 땀을 지나치게 흘린 거 같은데 이러다 탈진하는 건 아닌지. 그쪽 지리를 대충 아는 제 짐작으로도 밤재 방향으로 가게가 있을 거 같지 않았습니다.


 


유스호스텔은 의외로 깨끗했습니다. 구례남원 국도에서 보자면 버려진 건물처럼 느껴지거든요. 유스호스텔 뒤편에 짓다 만 콘도가 있어 그 물기 먹은 콘크리트 색감이 유스호스텔의 하얀 도색마저 잡아먹은 느낌입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스포츠 음료를 구할 수 있었고,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 동행인이 유스호스텔 측에 점심 부탁을 했던 모양입니다. 제 산행 습관 탓에 많은 음식을 먹진 못했지만 그 점심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치룰 뻔했죠. 거기서부터 네다섯 시간 걷는 중간 말미에 있는 계곡 산장을 제외하고 어느 음식점도 가게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점심을 먹고 난 이후부터 제 동행인과의 경계도 어느 정도 지워진 듯 보였습니다.


 


밤재 정상은 평화와 같은 곳이었어요. 이를테면 고립이 오히려 안정감으로 다가오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구례와 남원의 경계이면서 전남과 전북의 경계지만, 바다에 제아무리 선을 그어도 소용없듯이 산중이 물결처럼 남북으로 버티고 있어 경계의 의미가 애초 없어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제 생각에는 그 이유를 잘은 모르겠더군요. 아마 뜻이 필요 없는 자유가 우리에게 자연스레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군가 밤재 정상에 대해 묻어온다면 저는 그곳에서 평화와 자유를 느낄 수 있노라 말해 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이후 내리막길을 따라 편백나무 숲과 작지만 맑은 골짜기 등 산동면까지 이어지는 길은 밤재 정상에서의 느낌을 고스란히 품고 가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인적이 없어 산중 깊숙이 우리 자신을 덮어놓고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지리산 둘레길 탐방은 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제 딸아이가 수원에 있는 직장으로 복귀한다기에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같이 있고 싶어서 나름 수작을 부린 거였습니다. 녀석이 묘한 이야기를 했다더군요. 잠시 헤어졌던 남자 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했고, 그쪽 부모님과 인사도 마쳤노라고. 제 아내는 내년 쯤 결혼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전일 술 약속이 있어서 녀석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거든요.


 


열차 안에서 녀석과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좋은 친구라더군요. 녀석이 많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녀석이 이쯤 와있는지, 저는 녀석의 시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녀석도 객지에서 홀로 걷다보니 무서울 때가 있었을 겁니다. 되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겠고. 녀석이 동행인을 찾았네요. 녀석에게도 7시간의 산행이 남았군요. 어찌 걸어가는 과정이 쉽기야 하겠습니까. 지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죠. 녀석과 그 친구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동행을 잘 마쳐주길 빌 뿐입니다.


 


끝으로 저희를 도와주신 지리산유스호스텔 관계자 분들과 함께 해준 제 동행인께 감사 올립니다.


 


지리산은 제게 요점정리노트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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