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가탄-송정] 쉿! 비밀의 정원이 있어요

작성자
master
작성일
2021-04-16 11:34
조회
1229

법하마을을 지나
삼나무 세 그루를 시작으로 울창한 편백숲을 지나면  하동과 구례의 경계가 되는 작은재를 만난다.
야트막한 언덕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르다 보면 숨이 차다.
한 발자국 차로 경상도, 전라도 두 지역을 왔다갔다 하는 재미있는 곳이긴 하지만, 지리산둘레길에서는 경계는 아무 의미없다.


이 곳은 물이 풍부해서 예전에 논농사를 지었던 묵답이 많다. 산 위에서 논농사라...
80년대 초까지 이 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중간중간 깨진 사기그릇과 생활 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고난했던 삶이 고스라니 묻어난다.


2019년 이 묵답들 중 한 군데를 지정해 작은 숲속의 정원을 만들었다.
P&G다우니와 함께  "들꽃보호캠페인" 을 진행하면서
걷는이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들꽃정원을 만들었다. 지리산둘레길 공식 1호 정원인 셈이다.
되도록이면,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주변의 흩어져 있는 나무와 돌들을 일일이 지게로 옮겨와 무너진 돌담을 다시 세우고
울퉁불퉁 지멋대로 패인 바닥을 곡괭이로 파고 삼지창으로 골라 평평하게 만들었다.  손 씻을수 있는 작은 옹달샘도 만들었지만 후에 물난리에 다 쓸려 내려갔다.


흩어져 있던 돌을 모아 의자를 만들고, 물이 흐르는 습지이니 그 환경에 맞는 나무와 초본들을 식재했다.






원래 이 곳은 맷돼지들의 목욕탕이었다. 식재한 화초 뿌리는 그들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애쓰고 심어논 것들이 파헤쳐 흔적이 없이 사라진 것에 속상하기는 커녕,  이 곳이 원주인 맷돼지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더 들었다.
야심차게 심었던 토종창포는 흔적도 없고, 어디든 잘 적응해 산다는 부처꽃은 한 해만 반짝 비추고 흔적이 없다.
결국 타협한다. 이 곳은 쉬는곳이며 공유공간이며 ,큰 비가 왔을 때 흙이 더 이상 유실이 되는 걸 막아야 했다. 흙을 잡아줄 강력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노랑꽃창포를 식재했다. 마침 마당에서 키우던 개체를 나눠주신 분이 계셔 직접 캐와 지게로 매고 올라와 옮겨 심는 작업을 했다.



이식한 모든 아이들이 전부 살아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인위와 무위의 조화로움이 이 곳의 목적이다.
4월은 터줏대감 산철쭉이 얼굴을 보여줄 시기이다.
작년도 올해도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지리산둘레길 리본과 이 곳이 들꽃정원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긴 하지만
걷는 발걸음, 속도, 도착시간에 집중하다 보면 이 곳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길이다.
꽁꽁 숨겨진 곳이 아닌데도 본의 아니게 일부러 찾아 들러야 하는 비밀의 정원이 되어버렸다.
들꽃정원 입구에서 길이 두갈레로 나뉜다. 노랑꽃창포가 심어져 있는 습지길, 정원을 빙 둘른 정글같은 숲속길,
결국은 한 길로 만나 기촌마을 방향으로 연결된다.
종종 빠른 길이 아닌 빙 둘러 왔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도 들린다. 둘레길에서는 빠른길, 느린길은 의미없다.
그저 내 발걸음의 속도와 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는 곳이다.
누군가에겐 이 곳에 그냥 지나치는 길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머뭄이 된 길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비밀스러운 공간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겐 평범한 공간이 될것이다.
4월이 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분홍 산철쭉꽃에 둘러싸여 따뜻한 차한잔 마시고 갔으면 한다.
흐르는 물에 땀에 젖은 손도 씻고 가방에 들어 있는 먹을것도 꺼내놓고 한숨 푹 내려 놓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비밀의 들꽃정원은 조용히 비밀스럽게 다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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